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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순된 존재이다. 이 말을 살펴보면 그 존재는 관계를 통해 모순을 발견하는 동시에 관계없이는 삶이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닿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다만 사람은 각자의 간격이 있어 누군가는 대화를 하고 누군가는 칼을 빼들기도 한다. 평화와 자유에 대한 구호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역사와 같이 한다. 결코 해결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숙련된 세공사도, 공정한 재판관도 인간의 모순을 다듬고 다룰 수는 없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에서 국가에서 지역에서 무리에서 나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슬프고 기쁘고 가까웠다가 멀어지고 그 간격으로 삶을 지탱하는 방식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번 전시 ‘듣기의 형태’는 나-작가의 삶에서 발견한 작은 틈을 통해 세상과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그 간격은 아버지의 부재로 남겨진 보청기-소리로부터 비롯된다. 작가는 이전부터 꾸준히 소리를 매개로 작업해 오고 있다. 그 가운데 소리의 비가시성은 작업 전반의 배경지가 되고 있다. 비가시성의 외부에는 신체의 기능으로서 소리가 있으며, 내부에는 관계의 방식으로서 소리가 있다. 두 영역을 포개보면 소통과 왜곡이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여기에 작가는 세 가지 작업을 올려놓고 있다. 

 

‘듣다가 바라본 나무’는 3개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왜곡을 듣다가 바라본 나무, 푸른 열매, 아테네(안테나)로 전환하고 있다. 들려오는 소리가 이미지와 의미를 변형 시키고 소통에 영향을 주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6인의 듣기 평가’는 듣기 중 변화하는 얼굴을 부위별로 메뉴얼화 하고 6인의 성향에 따른 얼굴을 형상화 하고 있다. 과잉되고 유머스럽게 다가오는 조합된 표정은 사회적 인식과 통념을 드러내고 있다. ‘다항케 타타타’는 다함께 차차차라는 노래가 보청기를 통해 변형되어 들려오는 것에 대한 퍼포먼스이다. 분장된 노인의 춤사위에서 묻어 나오는 해학과 비애에는 사회적 신체로서의 소리가 입혀져 있다. 


소통과 왜곡은 소리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소리에는 형체가 없지만 듣는 사람들은 반응을 한다. 듣기가 형태를 이루는 것은 이러한 관계들이 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리-작품을 통해 그 관계들이 만들어 내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삶은 각자의 농도로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다. 작가가 소리-작품을 통해 닿으려 하는 것은 각자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결코 해결 될 수 없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도 작품의 한 가능인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더 잘 살아갈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작업 한다.”

*바이홍
 

 

 

 

 

 

 

900_이학승, 6인의 듣기평가, 영상, 19분54초, 2024.png

6인의 듣기평가_영상_19분54초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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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듣기평가_드로잉_50x50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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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가 바라본 나무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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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갸지 대화_3채널 사운드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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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항케 타타타_영상_5분14초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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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청기-소통메커니즘_드로잉_30x30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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