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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같은 바위, 바위 같은 감자
두 개의 덩어리에 자꾸 집착이 된다.
두 개의 덩어리는 다른 걸까
왜 내 눈엔 같아 보일까
감자 같은 바위는
산 위에 앉아 쓸쓸하기 그지없다.
다른 듯 같아 보이는 덩어리
다행히 북한산에 오르면
늘 그 자리에
아랫동네 아파트와 차와 길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살고 있다.
도시 배경의 감자바위는 아름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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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쌀한톨, 콩한알, 배춧잎, 감자, 멸치, 고기 한 점, 밥그릇, 먼지, 모래알, 머리카락, 실, 못, 칼날, 나사 하나......작은 단위의 사물들이 하나의 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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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 다른 하나를 만들고 이 하나들은 모여 거대한 덩어리가 된다. 또는 덩어리가 부서져 떨어져 나가 다시 작은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에 미치고, 나는 과연 어떤 작은 하나인가에 대한 생각이 든다. 개인과 사회는 아주 작은 부분이 모여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때론 개별적으로 때론 집단적으로 태도한다. 속 시끄러운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래알 같은 작은 점 하나를 찍어보는 일이었다. 점을 찍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느새 모래 군집이 되고 조금씩 다른 모양이 되어 응어리인지 덩어리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이 된다. 북한산 중턱 도시를 바라보던 감자 같은 바위, 바위 같은 감자를 기억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작은 점하나가 돌일지 바위일지 산일지 섬일지 알 수 없으나 덩어리의 형태가 되는데 그 수 많은 점들 사이로 길이 보이기도 하고 언덕이 되고 벼랑이 되기도 한다. 좀처럼 내가 점찍고 있는 행위가 작품이 될 수 있는지 의심되지만, 이 행위가 재밌기도 서글프기도 하다. 혼자 조용히 할 수 있는 작업을 찾고 싶었고 언제나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작업이 되고 싶었다. 세상의 작은 나로 살아갈 때 의지가 되는 그런 작업이고 싶다. 작은 점 하나로 시작해 모래알을 그려보는 것은 과연 아주 작은 나에게 어떤 변화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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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같은바위, 바위같은감자를 만들어야겠다.
존재감이 확실했던 덩어리.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있는 작은 점.
세상을 살아가는 살아있는 아주 작은 점 하나.
이름없는 바위_종이에 오일채색_44x44cm 4piece_2025
이름없는 바위_종이에 오일채색__44x44cm 4piece_2025
사소한 작은 둘_혼합재료에 무소블랙 채색_110x90cm_2025
사소한 작은 하나_혼합재료에 무소블랙 채색_170x244cm_2025
사소한 작은 하나 부분_혼합재료에 무소블랙 채색_170x244cm_2025
점들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_34.5x29cm_2025
감자같은바위 바위같은감자_한지에 무소블랙 채색_110x140x100cm_2025
조약돌만큼. 아니, 바위만큼 모래알만큼의 하나
어느 퇴근길이었다. 늘 오가는 6차선 도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빚었다. 꼼짝없이 차에 갇힌 나는 혀를 차며 부아를 내었다. 이놈의 도로! 이놈의 차들!
단지 피곤한 하루였다. 얼른 집에 들어가 몸을 누이고 싶은데 이 도시에 차는 너무 많고, 사람은 더욱 많아서 갈 길은 더디었다. 나도 알고는 있다. 이건 대상이 없는 화(火)다. 도로가 하루이틀 막혔던 것이 아니다. 저 차들이야 다들 그저 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오늘이라고 다른 날이 아니다. 그렇게 혼자 씩씩거리다 제풀에 지칠 무렵 붉은 후미등을 밝히며 서 있는 앞 자동차의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모난 곳 없이 둥그런 지붕이다. 차마다 지고 있는 지붕이 조약돌처럼 보였다. 하늘을 둥실 받치고 있는 동그랗고 작은 것들이 맨들맨들 빛을 반사하며 천천히 굴러가고 있다. 저 조약돌(같은 것)들을 딛고 커다란 강물 같은 세상이 느리게 느리게 흐른다. 운전대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조금 빠진다.
“우리는 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1
배성미의 개인전 《A tiny Dot》에 붙여진 작가 노트를 보며 나는 오래전 그 퇴근길의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불빛과 사람과 길과 차와 아파트가 스쳐 가고, 그 사이로 익숙한 고단함과 슬픔, 그리고 한편 상투적인 무심함이 스며든다. 내겐 조약돌 같았던 삶의 덩어리는 어느덧 배성미의 세계에서 작디작은 모래알이 되어 구르다가 또 어느 순간 커다란 바위가 되어 있었다. 감자 같은 바위다. ‘감자 같은 바위’와 ‘바위 같은 감자’가 자꾸 같아 보인다고 노래를 부르던 작가는 기어코 전시장 입구에 커다란 입체작품 〈감자같은바위 바위같은감자〉(2025)를 세웠다. 칠흑 같은 검은색, 밤의 빛을 머금은 덩어리다. 밤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공평하게 어둠은 내린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욕망이다. 더 아늑한 주거 환경의, 빠른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의, 자본주의적 향락을 위한 간판의 불빛, 불빛, 불빛들. 어둠 이외의 무언가를 더 원하고 더하는 것은 인간의 짓이다. 그러나 아무리 빛으로 환영을 덧씌워도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몸을 가리지 못한다. 세상에서 저마다 꿰차고 있는 부피만큼, 꼭 그만한 모양의 실루엣으로 세상의 것들은 존재를 드러낸다.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덩어리로서의 물질이다. 여기-있다, 그것만큼 확실한 존재의 증명이 없다. 어둠 속에서 감자는 감자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대로 그렇게들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내보인다.
감자와 바위. 혹여 저 멀리 산 중턱에서 덤덤히 도시를 내려다보는 바위와 금세 썩어 문드러질 감자가 비슷하긴 어디가 비슷하냐 한다면, 이 둘은 무엇보다 꼴이 닮았다. 모난 곳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적당히 움푹 패고 튀어나온 모양새가,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흔적 없이 사그라질 운명의 처지가, 이 둘이 유기물이냐 무기물이냐 화학적 분류를 따지기도 전에 그 꼴로써 서로 똑 닮았다. 사실 감자는 바위보다야 인간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배고픔을 덜어주는 구황작물이자, 농민의 손에서 키워져 우리의 밥상에 이르는 상품이자, 때로는 토지 개발에 밀려 쓸모없는 것으로 지위가 추락하는 팔자의, 덜컹거리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이다. 배성미의 작업에서 이런 감자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작가가 양평의 두물머리에서 농민들과 함께 실천했던 〈보리물고기가 된 땅〉(2015~2016)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발의 미명 아래 없어질 농지 위에 그 땅을 터전으로 삶을 일구었던 농부와 같이 더 이상 이곳에 심어질 리 없는 농작물(보리)을 예술 작품으로서 심고 가꾼 일이었다. 일회적인 프로젝트지만 시간과 정성과 노동을 동반하는, 이곳에서 머지않아 내몰리게 될 어느 가치에 대해 미련하리만큼 우직한 송가(頌歌)이다. 농사를 짓는 것도, 쫓겨나는 것도 종내에는 먹고사는 문제이다.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삶은 취약하고, 온통 사방에 ‘흔들리고 부딪치는 것들’2이 널려 있다. 이를테면 같은 밭에서 나왔어도 개중에 어떤 감자는, 또 어떤 배추는, 상자에 담기고 트럭에 실려 이리저리 흔들리며 옮겨지다가 누군가의 식탁에 오른다. 상품성을 인정받지 못한 어떤 작물은 경작을 마친 밭에서 대수롭지 않게 버려져 끝끝내 나뒹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비슷한 사례를 한도 끝도 없이 댈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단지 대단치 못한 상품으로서의 농작물, 사물일 뿐만 아니라 이를 만들어낸 노동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것이 정말 이토록 하찮은 것일까. 배성미의 작업은 이 무시되고 버려지는 것들을 거두어 작품으로 옮겨낸다. 여기, 실재한다. 당신 눈앞에 보이는 크기만큼,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만큼, 지난한 노동의 결과물로서. 그의 전작 중 〈뜻밖의 노동〉(2018, 2021)은 이런 작가의 뜻을 무엇보다 잘 드러낸다. 대구 북성로의 공구골목에서 주워 온 부품들은 낡아 버려진 것인데, 이를 주워다 작가는 쓸모를 다하였다는 오명을 벗겨내듯 얼룩을 닦고 광을 내어 대단히 귀중품처럼 장에 넣어 진열하였다. 이때 그의 작업에서 작품 소재나 상황보다도 더 리얼리즘적인 요소는 바로 작품으로 만드는 수행이었다. 설령 예술의 아우라(aura)를 등지고 있어도, 마땅히 그의 작품은 실제 물질세계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쓸고 닦고, 반복하는 노동은 고귀하다. 그러나 노동의 성스러움은 어떻게 해도 삶의 무게를 초월하지 못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무게를 매 순간 감내하는 것이다. 배성미의 작업은 이러한 ‘노동하기’로써 비로소 구축된다.
자연스러운 무게_혼합오브제 위 오일채색_6x6x13cm_2025
전시전경 부분
작가는 종종 “작업은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작업을 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 ‘정직’이라는 단어가 꽤나 인상적이어서 오래 곱씹어 보게 된다. 정직한 작업은 정직한 노동에서 나온다. 정직한 노동은 꾀부리지 않는다, 남의 것을 취하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수고스러움을 피하지 않는다. 배성미에게 근면은 삶의 지표이자 예술 실천의 방식이다. 이번 전시 《A tiny Dot》에서도 예의 그 근면함은 ‘점찍기’로 나온다. 빨간색으로, 파란색으로,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며 점을 찍는다. 담고 담아도 다 담기지 않을 무수한 것들을 그린다. 그것이 나인지 너인지 우리인지 그것인지 이름 붙이지 않고 행한다. 그냥 찍었다는 점은, 겹치고 흩어지며 어딘지 바위와 산을 닮은 모양이 된다. 복작거리는 인간의 삶에 비하면 저 바위는 어찌나 의연한지. 그런데 언젠가 바위도 부스러진다, 모래가 된다, 사라진다. 바위조차 마냥 세상사의 관조자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점이다. 홀로, 서로 기대어, 또 각자 저 멀리 떨어져 있을지언정 점, 점. 모두가 닮은 꼴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에서 개개인의 미시 서사가 어느덧 우주적 입장의 거시 서사와 포개어진다. 그 인식의 전개 과정에 행여라도 생략이 있을까,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배추 한 포기(〈사소한 작은 셋〉, 2025)를 무심히 던져 놓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점은 유일자(唯一者)도, 추상적 관념도, 허상도 아니다. 감자는, 배추는, 바위는, 점은 삼라만상 존재의 제유법이다.
그런데 존재 자체에는 위계와 단계가 없다. 크거나 작거나, 희귀하거나 흔하거나 하는 비교와 상관없이 존재에는 오직 (계속 또는 새로이) 존재하거나 (애초 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의 두 가지 결론만 있을 뿐이다. ‘거의’ 존재한다거나 ‘반쯤’ 존재한다, ‘더’ 존재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진법의 0과 1처럼 살거나 죽거나, 있거나 없거나 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것들은 전부 존재로서 평등하다. 콩 한 알, 멸치 한 조각, 하다못해 병뚜껑 하나도 다 세상에 있다는 점에서 같다. 이번 전시에는 〈사소한 작은 하나〉(2025)와 〈사소한 작은 둘〉(2025)이라는 한 쌍의 작품이 있다. 각기 흑백의 바탕으로 마주 보는 두 작품에는 균일한 간격으로 온갖 사물이 붙어있다. 어떤 물건의 일부이기도 하고, 그럴듯한 미니어처이기도 한 것들을 보며 그 형태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여기 사람이 있네, 공룡도 있구나, 하며 공들여 찾아내는 건데 그 사물을 세심히 관찰하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들이 다 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저 까만 점이다. 환한 바탕에서는 그나마 조금 더 형태를 구분할 수 있게, 그 바탕마저 어두우면 배경까지도 한데 뭉뚱그려 보이는 커다란 점이다. 이와 같이 어느 생명이나 사물이나 존재론의 측면에서는 무엇이 더 나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그저 점이라는 사유가 이번 전시에서 윤리적 대전제로 줄곧 반복된다.
사소한 작은 셋_mortar에 무소블랙 채색_ 25x33x19cm _2025
전시전경
따라서 배성미의 작품 제목에 붙여진 ‘사소한 작은 하나, 둘, 셋’에서 숫자는 우선순위나 순서가 아니다. 하나하나 개별 존재를 호명하는 것이고, 동시에 1, 2, 3, …, ∞(무한대)로 이어질 수많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다. 어느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하지 않으니 모두 다 사소하다. 그 속에 내가 있다. 세상의 것들에게 눈길을 맞추던 작가는 이윽고 스스로에게 그 시선을 멈춘다.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본다. 문고판 책 한 권, 돋보기 하나, 작은 돌멩이 하나이다. 돋보기를 써야 할 정도로 나이 든 몸으로 자신의 한 손으로 감당할 수 있을 법한 돌=물질을 취한다. 그 와중에도 책=예술을 버릴 수 없어 기어코 세 요소가 한데 뭉쳐졌다. 하지만 이들의 결속이란 가는 실로 허술하게 대충 몇 번 둘러놓은 게 다다. 금방이라도 풀어져 버릴 것 같은 이것들과 끝까지 함께 가려면 잘 움켜쥐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배성미는 〈자연스러운 무게〉(2025)라고 부른다. 삶이 별거냐, 각자 감당하고 감내할 만큼의 몫을 쥐고 가는 것이다. 점은 점으로서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부처처럼 해탈한 모습인데, 그런 그일지라도 어깨에는 여전히 돌덩이 같은 인생의 짐3이 메어져 있을 것 같다.
‘감자 같은 바위’이거나 ‘바위 같은 감자’이거나 결국 우주 전체의 한 부분이다. 무엇으로 보느냐는 시선과 관점과 마음의 거리에 달렸다. 산다는 것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초점을 맞추듯 나로부터 세상의 거리를,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이르는 거리를 조절하는 일이다. 내가, 당신이, 그것이 점으로 보이게끔, 아니 점으로 보이지 않게끔. 자칫 선문답처럼 느껴질 수 있는 주제이거늘 배성미는 전시 내내 끊임없이 물질성을 환기하며 구체적인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단히 두 발로 딛고 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삐죽 튀어나온 굴곡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삶의 힘겨움과 애달픔은 작품 속에서 덤덤하게 수렴된다. 그다지 완벽하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채 그대로 종국에는 다 하나의 점이 되었다. 작가의 손으로 세상이 이렇게 둥글려진다.
점 같은 사람이 점 같은 사물로 점 같은 작품을 만든다. 그것은 사소하지만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사건이다. 작은 점 하나. 작은 점 하나’들’. 모래알이거나 조약돌이거나 바위이거나 그 점 덩어리가 어떻게 생기었든 아무렴 어떠랴, 모두 다 이토록 가엾고 아름답다. 감자 하나를 손에 쥐어 보자. 이리저리 못생긴 주제에 손에 착 들어온다. 제멋대로 생겨도 될 것 같다, 제멋대로 살아도 될 것 같다. 세상과 나도 그렇게 맞춰지면 좋겠다 싶다. 점 하나니까, 사소하면 사소한 대로. 배성미의 《A tiny Dot》은 이렇게 우리의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돌이켜보게끔 한다.
김소라(큐레이터)
1 배성미 작가노트, 2025
2〈흔들리고 부딪치는 것들〉은 배성미의 작품명 중 하나로, 이 작업은 비디오, 조각, 설치 작품 등의 형태로 여러 차례 변주된다. 이 제목이 처음 등장한 초창기 비디오 작품(2007)에서는 개인의 감정과 관련된 단어인 ‘욕망, 자기애, 이기심, 용기’가 화면 속에 일렁였다. 그러나 2018년 재제작된 비디오에서는 키워드가 ‘욕망, 물질, 관계, 말, 시선’으로 변경되어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깊어진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후에는 같은 제목으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흔들리며 전달되는 배추, 대걸레 등의 사물을 캐스팅하여 구상 조각으로 구현하기도 하였다.
3 배성미는 본인의 배낭을 시멘트 캐스팅한 〈용기를 위한 기념비〉(2007)를 만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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