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돌보기, 돌아오기
외국어를 배울 때면 항상 나는 어느 나라에서 온 누구라는 말을 닳도록 배운다. 이방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얼굴이나 옷의 태에 달렸다기보다는, 스스로 소개하고 말하는 데에서 성큼 드러나는 법이다. 생각을 번역해서 말할 때 덮치는 오역의 불안함, 누군가와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을 때의 피로감, 혹은 일상에서의 낯선 눈짓이나 적대감. 이것은 매일의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모두의 이야기일 수는 있다. 펼쳐진 대지 표면에 선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두는 역사의 오랜 습관이 국경을 부유하는 이들을 덮친다. 자신의 몸과 기억을 이식하고 갈라 애써 파종하려는 이들에게 ‘돌아가’라고 한다면 어디로 돌아갈 수 있나. 다만 우리는 그저 서로의 돌아올 곳이 되어줄 뿐이다. 같이 한 음식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붙들 수 있게 말이다.
바닥과 가장 가까운 몸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선을 그려보기.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타국에서조차 이 몸과 딱 붙은 그 면적만큼은―한시적이고 좁다란 땅일지라도―내 것이다. 전시장 바닥에 있는 망초와 민들레, 고사리는 작가 오조(OZO)의 도자 작품으로, 실제 식물이 가진 형태 그대로 제작되었다. 잡초는 거친 환경에 살아남기 적합한 환경으로 진화해 왔는데, 빛을 더 잘 받기 위해 수직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과, 밟히거나 눌려도 살아남을 수 있게 수평적 형태를 취하는 것이 그것이다. 잡초는 비록 한 자리에 붙박여 있지만 제 생존법을 터득하고 반경을 점점 넓혀나간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몸을 따라 남겨진 선을 아주 조금씩 더 넓혀보자. 누군가 선을 밟고 이어져 그 선이 점점 내게 보이지 않을 때까지 확장되면 우리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오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워크숍, 요컨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음식을 차리며 일시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행위는 공간에 모인 이들을 환대하는 방법인 동시에 그가 가장자리를 늘리는 방식이다. 오조는 몇십 명을 먹일 음식을 요리하는 호스트를 자처하며, 다른 문화권의 작가와 협업을 통해 요리법에서부터 언어, 문화, 관계가 얽혀 나감을 경험해 왔다. 이는 작가 본인뿐 아니라 자리에 모인 게스트들이 직⦁간접적으로 느끼는 바이기도 하다. 그 나라 고유의 식물이 지닌 어떤 향, 어떤 모양이 각자에게 다른 향취를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방인이며 그렇기에 어느 우위도 없이 같은 위치에서 상호 의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1 이 식탁에 모인 이들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던,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이는 중요치 않다. 같다고 생각―혹은 착각―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 각자는 모두 다른 개인으로, 차이를 지닌 채 존재하고 그 차이로 하여금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발붙인 땅에 함께 선 이가 많아질수록 공동체는 순간일지라도 단단하다. 그것이 ‘발을 보고 걷던’ 이방인이 택한 외롭고 다정한 인사일 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어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2 머리로 이 사실을 되뇌일 때 아주 수월하게 느껴지는 문장은 실제 삶에 적용되기에는 늘 어려움을 동반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거니와, 안다 생각한 부분은 변하거나 모르고 싶은 부분은 외면하려 들기 마련이다. 나조차 알지 못하던 사실을 직시하는 기회는 때로 내 주변을 경유하여 나타난다. 오조는 프랑스와 한국, 레지던시와 집을 오가며 매번 행동반경에 자라난 여러 식물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식물의 원생산지와 이동 경로, 나라마다 다르게 불리는 이름 등 오조의 작업 전반에 녹아든 리서치의 흔적이 산재하다. 개중에는 민들레나 고사리처럼 익숙한 이름을 가진 개체가 있는가 하면, 세인트존스 워트(St.John’s-wort) 3 나 화이트 맨스 풋프린트(white man's footprint)4 와 같이 다소 낯선 풀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풀들은 통상 잡초로 인식되며, 나라와 지역을 가리지 않아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개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작가로서 그녀의 궤적과 닮아 있다. 작업의 어디에, 어느 식물이 있느냐에 따라 작가의 위치와 경로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니스의 빌라 아르송(Villa arson)으로 올라가는 길, 베를린과 함부르크의 거리, 돌아온 한국의 다산 신도시 오르막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오브제에는 자생 식물이 늘어뜨려져 있고, 그만큼의 추억이 켜켜하다. 양옆으로 얽혀 나갔던 움직임이 각각의 오브제를 타고 위아래로 다시 수렴된다. 어떤 만남과 연대, 그로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발 옆으로 놓이는 잡초부터 눈높이에 둥글게 위치한 풍광에 이르기까지, 공간에 놓인 작업은 유연하고 둥그스름하며 그럼에도 단단한 생김새로 만들어졌다. 긴 시간 흙을 매만지며 잡은 모양이 바람에 마르고 고온에 굳어지는 과정을 지나 지금 이 자리에 놓여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 건조 과정을 지나면서 본래의 오브제는 크기가 줄어들기도, 금이 가거나 유약의 두께에 따라 색이 변하기도 한다. 수많은 요소에 영향을 받아 어떤 모습이 끝에 있을지 속단할 수 없는 흙의 물성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저를 찾아온 작가와도 겹쳐진다. 또한 우리 모두도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러하다. 여러 오브제를 거닐다 보면 낮고 넓은 포석정이 우리를 기다린다. 개별로 놓인 작품이 아닌 하나의 장소로써 이 포석정은 잠시간의 만남의 장을 마련한다. 이 곳에 놓인 모든 여정을 거쳐, 여기로 돌아와 서로를 돌보았다 다시 떠나가자. 그렇게 각자의 가장자리는 넓어지는 법일 테니까.
한문희(아모)
1 오드리 로드,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시스터 아웃사이드』, 주해연, 박미선 역(후마니타스, 2018)
2 오드리 로드,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흑인 여성, 혐오, 그리고 분노」, 위의 책.
3 학명은 왕질경이(Plantago major)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이동, 정착해 교란된 지역에서 번성했기 때문에 ‘백인의 발자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Norh Carolina Extension Gardener, https://plants.ces.ncsu.edu/plants/plantago-major/
4 히페리시, 염소풀로도 불리며 우울증과 수면장애 등에 도움이 되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약학정보원, 「세인트존스워트엑스」, 『약물백과』, https://www.health.kr/researchInfo/encyclopedia.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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