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단 앞에서 내려가길 망설이는 사람처럼 글을 끝까지 쓰고도 첫 문단이 비어 있었다. 유혹적인 첫 문장, 두괄식 구성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생이 그리 매끈하게 시작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삶의 의미는 첫머리에 적혀 있지 않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채우며 만들어가야만 한다. 계획도 선택권도 없이 시작된 이야기다. 그래도 우리는 공들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시간을 들여 한 걸음씩 음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림의 입구, 표면에서 시작해 한 계단 한 계단 더 깊이 들어가듯 배수경의 이야기를 읽었다.
수채화 작업은 기억과 상상의 우물에서 갓 길어올린 물질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마주 보기>로 시작한 푸른색의 수채화에서 안료는 라피스라줄리 한 가지만 쓰였다. 까만 밤이 선명한 파랑이 되었다가 아침해에 녹아 밝아지는 시간대의 색깔들이다. 손을 담가 가만히 휘저어 본다. 투명해진 젤라틴 같은 기억의 조각들이 스치며 찰랑거린다. 형체가 있는 듯하지만 언제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마주보기_2025_pencil on paper_57x38cm

마주보기_2025_oil on canvas_91x73cm
수채화로 시작했던 작업은 점차 다양한 재료와 색으로 확장되어갔다. 일렁이는 물결 속 같던 이미지는 연필 소묘를 거쳐 유화로 넘어오며 조금씩 실체가 되어가는 듯하다. <가라앉는 도시>의 유화 작업에는 밝고 따뜻한 색들도 내리쬐듯 추가되었는데, 처음엔 색의 출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배수경의 상상은 이런 색들로 펼쳐지는구나 했을 뿐이다. 이른 새벽, 해 뜨는 하늘과 작품을 번갈아 보며 글을 쓰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찬 공기에 햇빛이 닿아 만들어지는 색이라는 것을 말이다. 푸른 공간 위로 늦은 오후의 노란색, 노을의 주황색, 구름의 분홍색이 드리웠다.
색채는 주변을 비추며 퍼져 나가는데, 공간과 인물들은 더 단단해졌다. 인물은 암석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채 시간이 지난 것인지, 아니 시간 자체가 덩어리져 굳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물들은 관객을 향해 말을 걸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공간과 시간을 되풀이하며 켜켜이 쌓이고 있을 뿐이다.

가라앉는도시_2025_oil on canvas_162.2x260.6cm
때때로 깨지거나 물에 반쯤 잠긴 석상, 혹은 석상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을 그린 것에 대해 배수경은 그리스와 로마 조각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특정 인물의 개성을 담은 로마의 조각과는 달리 그리스 조각이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추상적인 개념, 보편적인 감정이다. 영원 그 자체를 시각화하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수경은 그리스 조각을 볼 때 느껴지는, 시간 속으로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표정과 무게로 등장인물을 빚어냈다. 이들은 감정을 분출하는 주체가 아니다. 태양이 아니라 그 빛을 반사하는 달 같다. 더 어린 등장인물들 - 화살을 겨누는 아이들, 뗏목 위의 아이들,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선 아이 - 에게서는 유독 낮에 뜬 달 같은 고립감이 느껴진다. 과녁도 파도도 그들이 원해서 택한 것은 아니다. 주어진 무대는 너무 크고,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린애들은 무력하고 해맑고… 그런 존재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 아이들의 세계, 경험도 감정도 미처 채워지지 못한 해맑은 빈자리가 상황을 더 크게 공명시킨다.
사실 오랫동안 배수경의 작업에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곤충이나 새, 물고기가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간혹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엔 얼굴이 가려져 있거나 등을 돌리고 있었다. 동식물에 관심이 많은 친구이니 그 이유를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잔해속에서_2026_watercolor on paper_30x40cm

기차여행_2024_watercolor on paper_30x20cm
“이제는 사람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럼 그동안은 그릴 수가 없어서 못 그렸던 거야?”
“그랬지. 얼굴 표정이라든지 눈 코 입을 보거나 그릴 수가 없으니까 주변을 빙빙 돌았던 거였어”
“사람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을 나는 ‘이야기 속 인물로서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해석한다. 내러티브와 감정을 가진 인간은 무겁다. 때론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벗어날 수 없이 가까운 사이라면 의도치 않았음에도 상대를 짓누르고 만다. 그저 같은 이야기를 겪고 있을 뿐인 무고한 이들끼리 서로를 겨누게 된다. 이 이야기에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덮쳐온 이야기의 물살에 얻어맞으며 허우적대는 중에는 나 자신조차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다음 챕터가 시작된다. 스토리의 전개에 휩쓸리지 않고 사건과 감정,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시점은 그때부터인 것 같다.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젖고 얼룩진 마음을 말린 주인공은, 다시는 그 강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택할 수도 있다. 일그러진 얼굴들을 모두 지워버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갈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삶을 이어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수경은 그 강둑에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집을 짓고 머무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매일 흘러간 강물을 지켜보았다. 이야기를 끝낸 강은 점차 흙탕물이 가라앉으며 맑아져 간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손댈 수는 없다. 그래도 지나고 나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악의없는 겨냥_2025_oil on canvas_45.5x53cm
배수경이 지은 집에 가장 많이 방문하는 이들은 어린아이들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곤 한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누릴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다시 사는것 같아.”
실제로 아이들과 지내는 것을 보면 누가 선생이고 아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저렇게 서로 좋아할 수가 있나 싶다. 아이들은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의 구멍을 메워 주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닌 강둑은 머물 수 있는 단단한 땅으로 다져졌다.
“마음의 엉킨 매듭과 젊음을 서로 교환한 느낌이랄까. 좋은데 서럽고, 신나는데 차분하다.”
비로소 새로운 챕터를 직접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배수경이 쓰는 새로운 챕터는 다시, 과거에서부터 시작한다.
배수경의 그림은 사진 찍듯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이 아니다. 작품 한 점 한 점에 담긴 시간이 제법 길다. 하나의 화폭에는 순간의 장면이 아닌 한 시절이 담겨 있다. 화면 구성 자체도 스냅샷이라기보단 하나의 장Scene이 펼쳐지는 무대에 가깝다. 무엇보다 그려낸 방식에서 당시의 감정만을 담고 있질 않다. 모티브는 과거에 있지만, 새로운 이야기로 창작하고 그려낸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시간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내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고, 되짚어 돌아오는 식으로 그려졌다. 선명한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며 각색과 창작이 진행된다.
같은 주제를 다른 재료들로 반복해 그린 그림들을 순서대로, 다시 역순으로 본다. 이전에는 마주할 수조차 없었던 것을 마주하고, 더 오래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을 거슬러 되풀이해 오갔던 여정이 보인다. 마치 진주조개가 몸에 박힌 가시를 몇 겹이고 감싸 진주로 바꾸는, 배수경의 표현에 따르자면 “미생물이 사체와 쓰레기를 고운 흙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길고 지난한 과정이다. 이런 말을 하는 현재의 배수경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하하 웃고 있다. 끝난 이야기 속에 잠겨버리는 대신 한 번 오갈 때마다 반환점이 한 발짝씩 멀어졌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나, 과거와 현재가 반복해 겹치고 바라보는 순간마다 바뀌어가는 감정들이 겹친다. 수없이 겹쳐지다 보면 어느덧 드러나는 것은 기억 자체가 아닌, 작가가 그 시절을 기억하고자 하는 방식이자 의지일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무덤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들의 무덤이다. 남의 무덤을 함부로 여는 것은 실수라 해도 큰 실례다. 우리는 오랜 기간 아주 가까운 친구로 지내 왔지만, 허물없는 사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가장 아끼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가장 조심하고 싶다. 많은 대화를 하지만 행여라도 상처를 건드릴지 모를 질문은 하고 싶지 않다. 캐묻는 대신 한없이 이해하고 지지하고 싶다. 무덤을 닫아두기로 결정했다면 무덤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지냈을 것이다. 무덤 바깥의 세계도 너무나 아름답고 넓으니까. 게다가 나는 고통은 가능한 신속하게 망각의 늪으로 던져 버리는 편이다. 쓰고 버거웠던 시절을 되새김질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와 미래뿐이라고, 그것이 벗어나는 길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강둑에 머물기로 한 걸까?
결코 닿을 수 없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찾아가는 일은 어떤 기분일까?
왜 소중할까? 왜 기억하고 싶었을까?

악의없는 겨냥_2025_oil on canvas_100x130cm
이번 전시 <악의 없는 겨냥> 시리즈의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24년이다. 강둑에서 십수 년을 기다린 끝에야 시작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엔 모든 것이 훨씬 휘발되기 쉬워 보였다. 여전히 발이 푹푹 빠지는 무른 땅을 걷는 배수경을 나는 극장 바깥에서 바라보았다. 그때 배수경은 “정답을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라고 했다. 작가 본인도 알 수 없는 채 그려진 그림이라도 일단 그려진 후 시간이 지나면 부유하던 것들이 가라앉는다. 그림 또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려놓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나 보다. 몇 년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낸 지금은 오래 걸어 닦인 길처럼 남겨진 것들만 남았다. 남겨진 것들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잠들지 못한 밤은 무심히 밝다.
새로 쓰인 극은 무성 영화無聲映畵, Silent film이다. 바람 소리, 기차가 덜컹거리는 배경의 소리는 있지만 인물의 발화는 없다. 얼굴은 있지만 표정은 없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각색을 거쳐 수없이 반복 재생되는 동안 응고되어 평온하고 고요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시간은 계속해서 중첩되어간다.
이때껏 빈 극장엔 감독이자 주인공이자 유일한 관객인 배수경이 혼자 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화면의 색과 빛이 작가의 얼굴에도 어른거린다. 예술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일듯싶다. 티없는 완벽함은 부러움을 살지언정 위로나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괴로움이 없는 생은 없으니까. 서로 화살을 겨누기도 하지만, 서로의 무게를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 간의 관계니까 말이다. 그 차이는 똑같은 조건에서 전혀 다른 전개를 만들어 낸다. 어느 쪽으로 전개되었든, 그 와중에 남겨진 생채기들을 곱게 감싸안아 조금씩 더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가는 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삶 아닐까. 그러고 보니 지나가 버려 손댈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바뀔 수 있는 거구나.
십 년 만의 개인전이다. 작가로서 막막함과 조급함이 밀려와도, 반대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삶이란 생각이 들 때에도, 작업을 그만둔다는 선택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을 맴돌며 헤매고 있다 생각했지만 이제 와 보니 그 모든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러니 사실은 배수경의 첫 개인전인 것이다. 새로 쓰는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는 어쩌면 내 글이 너의 개인적인 서사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은 엄연히 보는 이의 서사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다. 어떤 이야기든 내가 가진 맥락에 비추어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품을 통해 넓어지는 것은 관객의 이야기이다. 배수경의 그림을 보며 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내가 얽혀 있는 관계들을 생각한다. 관객 역시 너의 그림과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쓸 것이다.
닫혀있던 장막이 걷히고, 현실의 화폭 위로 옮겨진 극을 이제 관객도 함께 바라본다. 배수경의 작업은 사자상이 지키는 무덤을 열듯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을 건너 깊숙이 묻어둔 자신을 찾아가도록 한다. 등을 떠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본인이 망설이고 다가가고 마주본 과정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빗장을 열고 자신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여기 용기를 북돋워 줄 마법의 쿠키가 있다. 전시를 여는 날 작품의 일부를 쿠키로 구워서 대접해야겠다는 아이디어야말로 배수경답다. 작가가 신나서 구워낸 사자상은 무덤을 지키기엔 영 어리숙한 얼굴이 되었다. 알록달록 달콤한 사자상 쿠키를 깨물어 먹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지난 시간이 우울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좋은데 서럽고, 신나는데 차분하다. 그리고 이 태도야말로 배수경이 오랜 시간 미생물 같은 마음으로 고르고 다져낸, 단단함과 따뜻함이다.
2026. 이노을

출구_2025_pencil on paper_30.5x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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